☆국가원로회 서신 224호☆
☆국가원로회 서신 224호☆
- 마지막 부자(富者) -
■ "옛날 노래 하나" 하고 운을 뗀 박정희는 단상에서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기나긴"까지는 헤쳐나왔다. 사실 원 가사는 "지나친"인데 "기나긴"으로 부르면서 고음으로 올라가는 "그 세~월~이~"를 힘들게 부르는가 싶더니 까먹고 잇지 못했다.
잠깐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고 나서는 이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저~어~어~즌 이즈러진 조각달"까지 가사와 함께 음정과 박자를 겨우 맞추었다. 또다시 고음의 시발점인 "강물도"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얼굴에 수줍음이 역력했다. 어색하게 넥타이를 매만지며 어설프게 가사를 잇자 듣던 이들도 혹여 다시 틀릴세라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를 함께 불러 18번 애창곡은 마무리되었다.
그 수줍고 소년처럼 부끄러워하던 박정희가 꾀한 혁명의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이었을까. 그런 수줍음에 목숨을 담보로 한 구국의 결사를 소리쳐 불러도 안나오는 고음으로 어떻게 감당하였을까. 탄신 104주년에 맞추어 포항에서 개최된 흉상 제막식에 참석한 수백 명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정희를 기렸다. 정정한 모습으로 축사를 한 90세의 전직 고위 관료 등 참석자들 대부분은 고령자들이었다.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 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진즉에 땅에 묻힐 사람들"이었다.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 준공식. 국민소득 40달러의 형편없는 나라의 버려진 땅 포항의 공장 굴뚝에서 드디어 기적의 연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박수를 쳤다.
그때 국회의원 한 사람이 말했다.
"공장 굴뚝에 연기가 나는 건 좋지만 공해가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가 정색을 하며 꾸짖듯 말을 했다.
"내가 살았던 1936년 당시 무공해 청정지역 경상도의 평균 수명이 36세였다. 공해는 무슨 공해. 먹고 사는 게 급선무다. 보릿고개를 없애야 한다. 팔자 좋은 소리 하지 말라"
새마을 연수원을 다녀온 마을 지도자들은 노름 안 하는 동네, 돼지 잘 키워 부자 되는 동네, 초가지붕 개량을 빨리하는 동네 만드는데 앞장서고, 중소기업들은 고속도로 화장실에서 오줌을 받아서 수출하는가 하면 은행잎도 주워서 수출했다. 미국에서는 디트로이트 트리뷴지가 그런 허접한 코리아가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한다 했다며 비아냥댔다.
■ 이승만이 미국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배워와 닦아놓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강력한 집념으로 지혜로운 국가발전의 모델을 제시한 박정희는 의식주 모든 분야에 걸쳐서 18년간 그 초석을 다졌다. 대한민국은 확 바뀌었다. 그러자 세계는 그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사회학자들의 기준으로 볼 때 독재자는 3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한다.
둘째, 엄청난 치부를 하여야 한다.
셋째, 치적이 없어야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어디 하나 해당 사항이 없다. 오히려 푸틴이나 등소평 등 공산국가의 독재자들까지 박정희를 경제개발의 모델로 기꺼이 추앙한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공산화'를 '민주화'로 둔갑시킨 반민주화세력 주사파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낙인을 찍었다.
전 KCIA 문정관 케네스 알프레드 캠펜은 1961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역사적 면담을 주선한 후 귀로에 박정희가 이승만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함에 하와이의 군 병원에 입원한 이승만과 독대하게 했다. 이 박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반가워했고 한 시간가량 계속된 전직 대통령이자 국부인 이승만을 병석으로 찾아가 위로한 그 자리의 분위기는 매우 따뜻했다. 케네스의 회고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누리는 물이라면 그 근원이 되는 이승만이라는 새암이 있고 우리가 그 토대 위에서 세계 10대 부국의 풍요를 누리는 나무라면 그 영양을 제공한 박정희 같은 뿌리가 있을진대 주사파라는 이념은 새암에 독을 뿌리고 나무를 뿌리째 뽑고 있다.
■ '공산화' 운동을 '민주화'라고 우긴 그들이 독재자의 자금이라며 찾으러 간 스위스에 300조 원은 당초부터 없었다. 대신 세계 부자들의 비웃음만 있었다.
부자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부자들은 너무 잘 안다. 어렵게 일구었기 때문에 그것을 후대에 세습시키기 위한 엄혹한 가문의 철학이 있었다.
370여 년간 부를 세습해온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은 첫째, 유능함을 드러내지 말고 몸을 낮출 것.
둘째, 언제나 대중의 편에 서서 피렌체 시민들과 함께할 것.
셋째, 의리와 신용을 중시할 것을 신조로 대물림했다.
1688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13대째 세계에서 의약 및 화학 분야에서 가장 선도적인 그룹으로 성장한 독일의 머크(Merck KGaA)社는
첫째, 가치를 지속하는 것으로 종업원의 과실이 없으면 병을 앓거나 다쳤을 때도 급여를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둘째, 혁신적인 변화와
셋째, 선택과 집중으로 성장을 추구하며 엄격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후계자를 양성하는 것을 모토로 한다.
나폴레옹 전쟁을 시작으로 유대인인 로스차일드家가 오랫동안 금융 황제 가문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원동력은 형제간 화합과 가족 결속의 전통을 중시한 데 있다. 가문의 문장은 질끈 묶여 있는 5개의 화살인데 이는 다섯 아들을 의미한다. 돈을 좇지 말고 인간관계를 만들어라, 정보는 돈이다, 예술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라는 가훈과 함께 여자는 사업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157년간 이어온 미국의 록펠러 가문은 스탠더드 석유회사 설립이 기반이 되었다. 미국 석유 생산의 95%를 독점할 정도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부를 축적했지만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를 강조했고 뉴욕시 수돗물 정수시설과 운영비용 전액을 지금도 부담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의 부호들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가문의 철학이 있게 마련인데 어디서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국가를 위한 富의 사회 환원이었다.
■ 임진왜란 전인 1568년 정무공 최진립으로부터 시작되어 1970년 12대 최준에 이르기까지 400년 동안을 하늘로부터 부를 누리며 살아온 경주 최부자집도 선대의 말씀을 지키며 이웃과 나라에 변함없는 헌신을 강조해왔다. 경주 교동 69번지, 대지 2천 평에 1만여 평에 이르는 후원, 마당 한 켠에 800석을 쌓아놓을 수 있는 창고, 노비 숫자만 100여 명에 이를 만큼 큰 규모의 최 부자네는 1671년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허다했을 때 과감히 곳간을 헐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다. 담보로 잡은 문서도 모두 불태웠다. 12대손 최준은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라면서 1910년 나라가 망한 후에는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며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20대 중반, 1915년에 조직된 비밀 독립투쟁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및 '대한광복회' 주요 조직원으로 자금을 제공하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100만 원을 보내는 등 전 재산을 담보로 자금지원을 하다가 탄로가 나서 헌병대와 평양경찰서로 끌려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데에는 교육사업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통감하고 살고 있는 집까지 모든 재산을 육영사업에 희사한다. 지금의 영남대학교가 그 일부이다. 세계사를 통틀어도 최초의 일로, 부자가 마지막으로 가야 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 지금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은 일본이 패망하여 재산을 가져갈 수 없게 되자 연고 중심으로 물려받게 된 업체들을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독려하면서 발전시킨 재벌기업으로 대한민국과 그 흥망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 나라는 공산화의 위기에 빠졌다. "나라가 공산화되면 대기업도 없다." 경주 최 부자 최준 선생의 음성이 들린다. 최준의 발자취를 더듬어 대한애국동지회를 이끌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등 애국자를 기리는 남인수의 몸짓이 사뭇 장렬하다. 2021년 11월 16일 '마지막 富者'는 끝났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