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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眞/역사적인 실록,사진

[스크랩] 사진으로 보는 광주사태의 진실...

by 보덕봉 2008. 7. 16.

사진으로 보는 518 광주사태

1980년 5월 22일은 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라는 수단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5월 17일에야 그 정보를 입수한 정부가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5월 18일 0시를 기해 517 긴급조치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내란 음모를 저지하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는 5월 22일 광주시청에서 태극기가 내려오고 인공기가 게양되었으며, 전라도 도청에서 광주 해방구가 선포되었다.

해방구는 공산당 자치행정구를 의미한다.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대부분의 소시민들은 어디서 장갑차와 기관총과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 폭약과 예비군 무기 등을 탈취해야 되는지 모른다. 그 어떤 배후 조직이 사전에 치밀하게 유혈 무장 폭동을 준비하였다가 그들의 시간표대로 5월 22일에 광주시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하였으며 도청을 해방구 사령부로 삼았다.

분명히 광주사태는 민주화 운동이 아니었음에도 그것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논리가 계속 미국문화원들에 방화하며, 반미운동을 일으겨왔다. 그러나 김대중이 국고를 탕진하며 김정일에 제공한 20억불이 핵무기 개발과 전투기 구입 등 전쟁준비로 사용되고 있는 이때에 주한미군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 나쁜 열매가 그 씨의 정체를 탄로시킨다.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거짓 논리가 한총련 같은 반국가단체, 전교조 같은 왜곡 교육단체들이 생겨나게 하며 우리나라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광주사태의 진실이 왜곡에 감추어져서는 아니된다. 실로 지금은 주동자들이 퍼뜨린 악성 유언비어를 거두어내고 진실을 찾아내어야 한다. 애석하게도 공개되지 않는 사진들이 있다. 폭도들이 파출서에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들을 납치하여 집단 구타하며, 마구 발포하는 장면 등은 사진으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 몇편의 사진이 1980년 5월 18일부터 한주간 있었던 광주사태를 증언한다.

방송국 방화

윤상원이 이끄는 폭도들이 광주 시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광주 MBC 방송국에 방화한 시간은 5월 19일 15:30 이었다.

518

광주사태가 중반기에 접어들기까지 공포탄조차 지급받지 못했던 계엄군과 달리 시민군은 초기부터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계엄군에 처음으로 공포탄이 지급된 때는 5월 21일 저녁 20만명의 시민군에 포위된 대대 병력(200명 추산)이 시민군의 맹렬한 사격을 뚫고 광주 외곽으로 탈출로를 열어야 했던 22일 자정 경이었다. 그런데, 시민군은 이미 19일부터 기관총, 수류탄, 폭탄 등의 화기를 갖추고 있었으며, 21에는 군납업체에서 장갑차들까지 탈취하였으며, 그들의 총에는 실탄이 장비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우발적인 사건일 수 있단 말인가. 폭도들이 소지하였던 무기 바로 그것이 518 사태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무장 폭동이었다는 증거이다.

시민군 경비병

5월 22일 광주시에 도청을 점령하여 해방구를 설치한 후 무장 폭도들이 도청 입구를 철통처럼 경비하고 있다.

무장한 시민군

총을 들고 청년들. 누가 아직은 순진하여야 할 이들을 국군에게 사격하는 폭도들이 되게 하였는가?

무장폭도

폭도들이 군인들을 사살할 때 쓰던 기관총이 도청 마당에 있다. 국군 경비병들에게는 아직 공포탄조차 지급되지 않았던 5월 21일 저녁에 시민군이 기관총으로 맹사격을 하였기에 계엄군은 5월 22일 자정에 도청에서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야만 했다.

기관총

폭도들 중 다수가 군복을 입고 지프차를 타고 있었기에 광주 시민들은 군인과 시민군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희생된 광주시민들 중 대다수는 폭도들의 총에 희생되었기에 우리는 시민군의 정체를 보다 정확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시민군 차량

무장 시민군의 차량 행렬. 폭도들은 무장 유혈 폭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국민은 누가 이런 선동을 하였는지 궁금히 여긴다.

시민군과 광주

총을 들고 광주 시내를 활보하는 시민군 병사. 이들은 아무데나 총을 쏘았으며, 광주시민 희생자들 중 대다수는 시민군의 총에 맞았다.

광주사태

이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5월 22일에 도청을 점령한 폭도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청 지하실에 광주시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폭약 장치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의 쿠데타 거사 예정일이었던 5월 22일에 때를 맞추어 대형 트럭 한대분의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준비하여 두고 있었다는데서 우리는 광주사태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광주사태 당시 간첩단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북한군이 침투하였었다는 여러 징후들이 발견되고 있다. 다행히 소준열 장군이 한 사복차림의 군무원을 비밀리에 보내 5월 25일과 26일 양일간에 다이너마이트 폭약의 뇌관들을 모두 분리시키는데 성공하였기에 광주시민들은 참화를 면하였으며, 김일성의 남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청소하는 군인

5월 27일 새벽에 폭도들의 손에서 광주시를 되찾아 광주시민들에게 돌려준 계엄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시민군이 한주간 어지럽힌 광주시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었다.

계엄군

5월 27일 아침 부지런히 광주시를 깨끗하게 청소한 계엄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광주시민들에게 쌀을 배급하는 것이었다. 5월 22일 아침부터 5월 27일 아침까지 폭도들의 해방구 치하에서 광주 서민들은 극심한 생필품 부족난을 겪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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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파와 우파가 함께 정론을 추구하는 시사토론장
http://cafe40.daum.net/_c21_/bbs_list?grpid=UnPX&fldid=HB

* 5.18 광주사태의 진실을 탐구하는 글 모음
http://www.theology21.org/ko/518.htm

* 노무현의 대국민 하야 악속 지지 토론장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news/discussion.htm

출처 : 무한전진(無限前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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