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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身濟家/호운앨범

靑松 沈氏

by 보덕봉 2015. 1. 28.

청송 심씨

靑松 沈氏

Contents

1. 개요
2. 유래
3. 역사
4. 유명 인물
5. 가상 인물
6. 친선 가문
6.1. 신천 강씨(信川 康氏)
7. 적대 가문
7.1. 반남 박씨(潘南 朴氏)
7.2. 파평 윤씨(坡平 尹氏)

1. 개요

대한민국 경상북도 청송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집단.

다른 씨와는 달리 청송 심씨는 널리 알려진대로 파평 윤씨와의 오랜 마찰이나 심씨 집안에 내려온다는 반남 박씨 집안과의 은원관계로 유명하다.

본관인 경상북도 청송군, 함경남도 풍산군 등에 흩어져 있으며[1]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65,744가구 총 212,717명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때도 물건너 온 집안답게 소수인원으로 대두되는 집안이었으나, 고려말 시기를 잘 타는 덕분에 조선 중기까지 세도가로써 역사에 자주 거론이 된다. 특히 조선에 들어서는 왕비 3명, 상신 13명, 문형 2명, 청백리 2명, 호당 2명, 공신 8명, 장신 1명, 문과 급제자 194명을 배출했고 총 문과급제자수는 224명, 정승 13명, 판서 23명, 왕비 3명, 부마 3명을 배출하였으니 나름 훌륭한 집안이었던 셈이다.

실제로는 작정하고 찾아보면 막상 그렇게 흔한 성씨는 아닌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어려운 편은 아니다.
 

2. 유래

기원을 거슬러 가보면 중국 주나라까지 거슬러가는데 주나라 문왕의 10남 담계재(聃季载)[2]가 분봉받은 심나라로 20대가 지나 나라에게 망한 뒤 그 후손들이 한반도로 넘어온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정설이다. 흠좀무...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3]을 역임한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그의 생몰연대나 사적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어 알 수가 없다.
 

3. 역사

기록상 심홍부의 증손인 심덕부와 심원부의 대에서 가문이 크게 흥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에 서울집 등으로 불리는 심씨집안의 사실상 실세인 경파가 갈라져 나온다. 경파는 다시 심덕부(沈德符)의 아들 7형제(兄弟)에서 도총제공파(都摠制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성주지사공파(成州知事公派)·인수부윤공파(仁壽府尹公派)·안효공파(安孝公派)·청원군파(靑原君派)·동지총공파(同知摠公派)의 7계파(系派)로 갈라진다.

 

반면에 심덕부(沈德符)의 아우 심원부(沈元符)는 고려 말에 여러관직을 거쳐 전리판사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본관[편집]

심덕부는 충숙왕 때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한창 왜구가 기승을 부리던 우왕 무렵에 왜구 퇴치에 많은 공을 세웠던 무신으로 후에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 회군을 함께하고, 1392년 조선 건국의 공을 세워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 영삼사사를 지내고, 정종 즉위년에 문하부 좌정승을 지냈다.

그의 아들 심온은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에 딸을 시집보냈는데 (소헌왕후) 다들 아시다피시 나중에 충녕대군은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태종에게 외척 경계의 일환으로 철퇴를 맞아 한동안 가문의 위세가 위축되었다가[4] 문종 때 심온 사건의 재조사를 벌여 신원되고[5] 심온의 둘째 아들인 심회가 심온의 외손자인 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하게 되어 기세가 회복되었다. 이 사람은 나중에 폐비 윤씨의 일로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를 당하고 손자 심순문은 연산군의 어의에 대하여 크기를 논하다가 갑자사화때 참형을 당하는데[6] 폐비 윤씨는 파평 윤씨의 분파인 함안 윤씨라 나중에 아래에서도 설명할 산송을 생각하면 악연이라 하겠다.

어쨌거나 심순문의 손자 심강의 딸이 명종비 인순왕후, 아들이 심의겸이라 이 사람은 외척이면서도 권신들로부터 사림을 지킨 공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후 선조때부터 가문은 서인, 노론에 들었는데 사림의 명망을 얻었던 심의겸이 서인의 거두가 되며 정조와 비밀 서찰을 주고 받은 것으로 유명한 노론의 거두 심환지[7] 역시 이 가문 출신이다. 명종비 인순왕후 외에도 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까지 총 네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4. 유명 인물

근대시기 이 가문 인물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라면 상록수, 그날이 오면의 작가 심훈, 그리고 고자로 유명한 심영[8]을 들 수 있다. 현대 인물중에는 코미디언영화감독 심형래, 가수 심수봉[9], 야구선수 심수창, 탤런트 심은경, 심은하, 국회의원 심상정, 심재철 등이 있다.
단, 탤런트 심이영은 본명이 김진아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
 

5. 가상 인물

이수일과 심순애의 심순애가 있다.

6. 친선 가문

6.1. 신천[10] 강씨(信川 康氏)[11]

심온의 아들 중 나중에 영의정이 된 심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온이 화를 입을 때 다른 자식들은 다 죽고 유모가 아직 젖먹이이던 심회 만을 업고 달아나 경상도 선산 땅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자 인근 삼밭에 들어가 잠들었다. 이 때 꿈 속에서 삼밭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꾼 강거민(康居敏)이라는 사람이 달려와 이들을 거두었다. 강거민 슬하에서 자란 심회는 세종 말기에 아버지 심온의 억울함이 밝혀져 신원되자 도성으로 올라가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올라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나중에 강거민과 그 부인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선산으로 내려가 6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에 자신들의 선조를 보살펴준 은혜를 생각해 청송 심씨는 지금도 신천 강씨(信川 康氏)와는 혼사를 맺지 않는다[12]고 한다.

7. 적대 가문

7.1. 반남[13] 박씨(潘南 朴氏)

세종께서 새로이 즉위하셨을 때 태종께서는 상왕의 자리에 있었다. 박은(朴訔)[14]이 총애를 받아 태종 곁에서 일을 맡고 있었는데, 심온(沈溫)[15]이 세종의 장인인 것을 시기하여 마침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간 틈을 타 백방으로 근거 없는 비방을 퍼뜨리고는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상왕(태종)은 심온이 돌아오는대로 압록강에서 그를 잡아 사사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세종과 소헌후께서도 막을 수 없었다. 박은은 사사로이 자신의 병사를 내어 심온의 집을 포위하고 그 자손들을 남김 없이 잡아 죽였다.

(중략)

심온이 이를 갈며 말하기를, "내 자손 가운데 혹 살아 남는 이가 있어 다행히 내 말을 전해 듣거든, 앞으로 영원히 박은의 집안과는 혼사를 맺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출처 : 홍한주 - 지수염필


위의 이야기는 청송 심씨 집안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반대로 반남 박씨의 집안에는 이런 이야기는 한 조각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실록 등에도 박은이 태종의 명을 받아 심온의 집안을 멸문시킨 것에 대한 내용이 있으나 박은이 사적으로 심씨 집안을 몰락시키려 했다고는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실록에는 그의 동생인 심정이 박습, 강상인과 함께 상왕인 태종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선위한 태종의 군권을 축소시키다 태종의 노여움을 사 참수되는 과정에서 심온이 배후로 지목되어 자결을 명받고 죽었다가 세종때 무고로 밝혀졌다고 기록되어있다[16].
  • 야사에 따르면, 심온의 인덕으로 인해 그의 죽음의 후폭풍을 두려워한 태종은 심온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대려가 자결하게 만들라고 박은에게 명한데다 난리통 속에서 유일하게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심온의 자식은 갓난아기였다. 지수염필에서는 심온의 몸종이 자기 자식을 심온의 자식이라고 속여 포졸에게 넘겨 죽게 한 후 심온의 자식을 빼돌려 선산 지역의 강씨 집안으로 피신하였는데, 아이는 자라서 강씨 성을 따라쓰며 감히 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생을 마쳤다. 심온의 손자 대에 이르러 마침내 심씨 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박은 자신이 양심고백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심온이 남긴 유언이 정상적으로 자손에게 전달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근데 이 이야기는 그냥 전해져오는 이야기이고, 손자 대까지 갈 것도 없이 심온의 첫째 아들 심준(沈濬)은 세종때 영중추원사를 지냈고, 둘째 아들 심회(沈澮)는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세째 아들 심결(沈決) 역시 세조 때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더해서 굳이 박은이 양심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박은이 혼자서 심온을 데려간 것은 아닐테니 박은이 데리고 간 군사들이나 당시 심온을 모시던 노비들이 살아남아 자식들에게 전했을 수도 있다.
태종의 외척 견제로 억울하게 죽었지만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선왕인 태종을 욕할 수도 없어 애꿎은 박은만 원망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7.2. 파평[17] 윤씨(坡平 尹氏)

윤관과 심지원 묘는 파주에 있다. 윤씨가 먼저 이곳에다가 묘를 썼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그에 대한 기록을 잃어버리게 되니 심씨가 그 산을 점령하고는 심지원의 묘로 썼다.

출처 : 영조실록


파평 윤씨 가문의 윤관 장군은 함흥평야에 9성을 쌓아 여진족과 싸운 고려시대 명장으로 1111년에 서거하였는데 이때 예종이 친히 그의 묘를 정해주었다.

양 문중 사이의 묘지 다툼은 조선 중기인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 바로 위에 부친 묘를 조성한 뒤 일대 땅을 하사받아 문중 묘역을 조성하면서 비롯됐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년이 지난 1763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발전했다.

양 문중은 모두 조선시대 왕비를 3~4명씩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당시 임금이던 영조가 고민 끝에 두개의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화해를 구했으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해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매를 맞아 죽는 형을 당하는 등 원한 만 깊어졌다.


 

두 문중은 조선시대 왕비를 4명(파평 윤씨), 3명(청송 심씨)씩 배출한 외척 가문이었기 때문에 당시 영조도 손을 쓰기 힘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도 산송을 반복하다보니 영조도 빡쳐서(...) 대표자들을 귀양보낸 적도 있고 귀양 도중 윤씨 집안 사람이 죽기도 하는 등 정말 살벌하게 산송이 진행되었다.

첫 산송이 있은지 400여년 만인 2006년 원래 묘지로부터 120m 떨어진 장소의 땅을 파평 윤씨 집안의 재산으로 장만하여 청송 심씨 집안에 넘기고 심지원과 일가의 묘를 그 쪽으로 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청송 심씨 집안에서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400여년에 걸친 두 가문의 산송 다툼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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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4군 6진 개척 때 경상도에서 함경도로 이주를 많이 했다고 한다.
  • [2] 또는 염계재(冉季載)
  • [3] 종9품에 해당하는 하위 직책으로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처음 관직에 오를때 역임한 문관지책이다.
  • [4] 아래의 반남 박씨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사실 태종이 외척을 경계했다기 보다는 청송 심씨쪽에서 태종을 경계하다가 분노를 산 것이다. - 근데 태종은 이미 자신의 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집안도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 숙청해버린 전례가 있다... 어?!
  • [5] 사실 세종도 장인어른을 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처분을 내린 것이 아버지 태종이었기 때문에 자기 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듯 싶다.
  • [6] 일설에는 순문이 아끼던 기생을 연산군이 빼앗아가자 불평을 늘어놓다가 걸러서 형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조부의 연좌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현재는 전자의 내용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편이다.
  • [7] 심의겸 형의 8대손이다.
  • [8] 사실상 이 목록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사람이다(!)
  • [9] 본명은 심민경이다.
  • [10] 황해도 신천
  • [11] 왕건의 조상인 호경의 후손들이며 조선조에는 신덕왕후 강씨 등의 왕후를 배출한 가문이었다.어째 태종한테 철퇴를 맞은 가문들끼리 연이 맺어진건 기분 탓이다.
  • [12] 즉, 같은 혈족이나 다름없게 여긴다.
  • [13] 전라남도 나주시의 옛 지명
  • [14]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 조선 개국 후 2번의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책록되었다. 의금부판사 때 신장의 정수를 1차에 30으로 정하여 합리적 형정제도를 시행했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세종 원년 영의정에 오른다. 고려말, 이인임을 탄핵하다가 역으로 매를 맞고 귀양길에서 죽은 신진사대부 박상충의 아들이다.
  • [1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strong>세종의 장인</strong>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한 뒤 병조·공조의 의랑을 지내고, 정종 때 대호군, 1411년 풍해도관찰사, 대사헌, 1414년 형조, 호조 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냈다.
  • [16]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에 의하면, 병사의 배치를 태조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죄를 받은 강상인, 박습, 심정은 본래 귀양형을 받게 되었으나, 이후 태조가 심온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비치자 병조좌랑 안헌오가 아뢰길 심정이 박습, 강상인과 함께 사사롭게 말을 나눌때 '지금 명령이 상왕과 주상의 두곳에서 나오니 이는 한곳에서 나오는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하여, 태종이 박습, 강상인, 심정을 유배지에서 잡아들여 다시 국문하자 심온이 연루되어있다는 고백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청송 심씨 집안에서는 '고문을 못이겨 거짓증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잡아들인 날자와 자백을 한 날자가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18] 급한 김에 형을 방패로 벗어나려 했다 집안을 말아먹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 [17] 경기도 파주시의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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