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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眞/역사적인 실록,사진

* 1 . 4후퇴* 를 기억합시다!

by 보덕봉 2023. 1. 5.

"1ㆍ4후퇴"를 기억합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ㆍ4이후 나홀로 왔다."

오늘은 73년 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유엔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원주-삼척선으로 철수한 날입니다.

이 날을 우리는 "1ㆍ4후퇴"라고 말합니다.

1951년 1월 3일, 중공군이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서울을 사수할 수 없게 된 미8군사령관 <릿지웨이>장군은  유엔군을 서울 이남으로 철수시켜 평택-원주-삼척선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재정비 하여 반격을 한다는 작전을 세우고 후퇴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전의 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의정부 가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릿지웨이 장군이 후임으로 부임하였음)

이 소식과 함께, 정부는 신속히 서울시민에게 피난을 떠나라는 방송을 하게 되었으며 140만 서울시민은 다시 남으로 피난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1951년 1월 4일이었기 때문에  "1.4후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인데, 그 엄동설한에 어린 자식을 업고, 걸리며, 피난보따리를 이고 지고, 꽁꽁 언 한강의 얼음판을 밟고 140만 서울 인구가 남으로 내달렸습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피난열차를 타고 간  경우도  있었지만, 피난열차라는 것도 대부분 덮개가 없는 무개화차여서 기차가 달리면 살을 후벼파는 세찬 바람은 견디기 어려운 고행이었습니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자서전에서 "아현동 무악재를 넘어 독립문으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은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것 같더라."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서울시민이 떠난 서울은 텅비었습니다.

전 시민이 빠짐없이  피난을 떠난 것은, 6ㆍ25 북괴군 남침 시에 피난가지 못 해 서울에 남았다가 석 달동안 북괴군에게 시달리던 악몽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였습니다.

정부도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고 유엔군 사령부도 대구로 내려가는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북에서 탈출해 온 피난민은 300만 명이나 되었으며, 수도권에서 도합 600만 명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피난살이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1천 만 이산가족'이 생긴 것입니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행사 때에 나타난 이산가족 대부분이 1.4후퇴 때 헤어진 가족들이었음을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혈육이 헤어져 살아야 했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 이산의 아픔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겁니다.

저는 고향이 남쪽이라, 그런 아픔은 느끼지 못 하고 자라서, 친구들 중에 부모님의 고향이 이북이었던 사람들의 피난살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때의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정도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한 <E.H.Carr>의 말 처럼, 우리는 "1ㆍ4후퇴"의 눈물어린 피난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기억을 해야합니다.

3년 전쟁의 고통을 촉발시킨 김일성 족벌은 3대가 세습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갑자기 서울에 미사일이 떨어지면 '남부여대'(男負女戴 :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인다.)하여 피난을 떠나야 할 불행한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에  "득총사욕 거안여위(得寵思辱 居安慮危) 즉 사랑을 받고 있을 때 욕됨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편안하게 살 때 위험이 있을 것을 미리 생각하고 대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북괴는 새해벽두 부터 미사일 도발을 벌이면서 '핵무기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겠다'는 호전적인 발언을 쏟아내었습니다.
정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 국민들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73년전 오늘을 생각하면서- 月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