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장미는 내 가슴에, 술은 내 손에, 연인도 내 곁에 있으니, 그런 날엔 세상의 군주도 나에겐 한낱 노예일 뿐”, “나의 종단(수피즘)에선 술이 허용되거늘, 장미 같은 몸매 당신 얼굴 없이 술 마시는 건 금기라네”라고 노래한다. “신은 창세기 때부터 술 이외의 선물은 주지 않았고”, “내 존재의 토대는 취하면서 쌓여 갔으며”, “슬픔의 약은 술”이며, 또한 잠시드(페르시아 전설의 왕)처럼 술잔을 통해 세상사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피즈의 가잘에서 술은 차원 높은 은유를 바닥에 깔곤 한다.
시인은 술을 ‘신의 이슬’로, ‘빛’으로, ‘불타는 루비’로, ‘이성의 집’으로 여기면서 취함에서 깨달음을 얻고, 술잔에서 연인의 얼굴을 보며, 취한 눈에서 기쁨을 찾는다.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싸끼(술 따라주는 자)는 신의 뜻을 전달하는 자로 둔갑하며 그와 교감한다. 요컨대, 하피즈에게 술은 저질스런 주색, 주벽 개념이 아니다. 중국의 시선 이태백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사실 이태백의 조상은 페르시아어권 안의 쇄엽(碎葉: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토크막)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600여년 시차를 뒀음에도 두 시인은 경력이나 영적 경지에서 동병상련, 막상막하, 피장파장이다. 그렇게도 닮은꼴일 수 없다. 술 한 말 시 백 편의 주선들이니까.
시성의 큰 그릇에는 심원한 인생관과 세계관도 나타난다. “인생의 역(수피즘의 상승단계)에서 기쁨과 평안은 순간, 낙타 방울은 가마 문을 닫으라 하네, 또 다른 역을 향해”라고 끊임없는 수양을 독려한다. 한편으로는 “이기심 때문에 모든 일 구경에 오명만 남기니”라고 이기심을 꾸짖는다. “하피즈여, 세상의 정원에서 가을바람에 괴로워 마라, 이성적으로 따져 가시 없는 장미가 어디 있더냐”고 고진감래의 인생철학을 설교하기도 한다. “난 가난을 존경하며 재물의 만족을 원치 않나니, 왕께 여쭈어라, 하루 세끼는 신이 주신다고”라며 시인은 청빈을 떳떳해한다. 한편으로는 “무덤 속의 한줌 흙, 고대광실이 하늘을 찌른들 무슨 소용인가”, “정신이 온전하든 취했든, 모든 이는 연인의 추종자, 모든 곳은 사랑의 집, 이슬람 사원이든 유대교회든 신은 어디에나 있다”며 수피즘의 이념, 만민평등과 무차별의 정신을 역설한다.
하피즈의 시는 아랍 세계와 서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독일 문호 괴테는 그를 ‘대적할 자가 없는 시인’이라고 극찬하면서 은유나 상징어 등 시적 소재들을 본받아 서정 연시집 〈서동시집〉(1818)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괴테와 연인 마리아네 사이에 오간 편지가 실렸는데, 그중에는 하피즈 시집 〈디반〉의 장과 페이지, 시행의 숫자를 언급한 암호편지도 들어 있어 그 감응력을 짐작하게 한다. 철학자 니체도 ‘하피즈에게’란 송시를 썼다. 그의 시집은 300여년 전 서구에서 처음 번역한 이래 지금까지 수십 종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유엔도 그의 가잘 50편을 엄선해 책으로 펴낸 바 있다.
묘당에 곁달린 차이하네(찻집)에 들렀다. 참배객들은 삼삼오오 차를 마시고 물담배도 피우며 다리쉼을 한다. 가끔 시낭송모임이나 추념식 등도 열린다고 한다. 한마디로, 역사 속에 사라진 망자의 으쓱한 무덤이 아니라, 지금 산 사람과 대화하고 교유하는 삶의 현장이었다. 위인은 육체적으로 한번 죽을 뿐,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또 한번의 죽음을 당하지는 않는 법이다.
글·사진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3천년 전 조로아스터’에 뿌리둔 이슬람문학 대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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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즈에 있는 이란의 대표적 서정시인 사디 영묘의 전경.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정원 속에 자리해 위대한 시성을 추앙하고 그의 영혼과 대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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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문학은 이란 문학은 아랍, 인도, 터키 등을 아우르는 이슬람 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이다. 고대 페르시아 문명의 월등한 유산과 실크로드 문화 산물을 이어받은 이란인들은 글짓기에 탁월해 오마르 하이얌, 하피즈, 피르다우시 등의 세계적 시인들을 배출했다. 7세기 아랍인의 정복 뒤 아랍 글자와 어휘들이 이란어에 스며들었지만, 그들은 아랍문학까지 포용하면서 이슬람 문학사의 주류를 형성했다. 튀르크 제국을 비롯해 중근세 이슬람 세계의 궁정 문인들은 이란어 작품을 짓는 것이 필수였다.
이란 문학의 뿌리는 3천여년 전 조로아스터 경전 등의 고대 페르시아 운문, 문헌집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이어 4~5세기 사산조 이란에서 창조된 여러 기록물들은 이슬람문화가 태동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저 유명한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는 바로 사산조 문학이 낳은 산물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시를 바탕으로 한 이란 문학사의 본류는 9세기 중앙아시아 부하라에서 일어난 사만왕조 때를 기점으로 본다. 수피즘 교단의 신비적 영향을 받은 이 왕조 치하의 이란 동부에서는 10세기 루다키와 아브 슈크르 등의 서정시 선구자들이 나왔다. 11세기엔 지금도 애송되는 4행 시집 〈루바이야트〉의 지은이 오마르 하이얌이, 13세기엔 신비시의 대가 루미가 나타났다.
몽골 침입으로 이란 북동부가 쑥대밭이 되자 13세기부터 문학의 새 중심으로 떠오른 곳이 남부 시라즈다. 사랑의 시 ‘가잘’과 2행 대구체의 낭만시 ‘마스나위’는 시라즈 출신 사디와 하피즈를 통해 여문 이란의 독창적 장르다. 하지만 시라즈에서 꽃피운 이란문학의 본거지는 16~17세기 동쪽의 인도로 옮겨간다. 궁정에서 터키어를 주로 썼던 사파비 왕조가 종교시 외의 문학 후원을 외면하자 우르피, 칼림, 사이브 등 많은 이란 시인들이 조국을 등진 채 인도 무굴제국의 궁정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세기까지 가잘, 마스나위 같은 이란 특유의 장르는 오히려 인도에서 애송되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