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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조선 땅`

by 보덕봉 2012. 4. 14.

 


`대마도는 조선 땅`
울릉도와 독도는 물론이고 대마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스스로
확인하는 일본지도가 독도박물관에 소장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입력 :   2005.03.16 14:4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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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박물관 이승진 관장은 18일 "일본이 만든 조선국지리도 가운데 팔도총도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그리고 대마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 지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만든
지도로,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한 현존하는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고 이종학 초대박물관장이 기증한 이 지도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 있는 것을
이 관장이 몰래 촬영한 것이다.

조선의 섬과 팔도만 그린 이 지도는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충청도, 함경도, 전라도,
황해도, 평안도 등 조선 팔도와 함께, 섬으로는 동해에 우산도, 울릉도, 남해에는
대마도, 거제도, 제주도 그리고 서해에는 진도, 흑산도, 군사도, 강화도 등이 조선 땅
으로 명시돼 있다.

"이 지도는 현재 발견된 일본 지도 중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로
일본 스스로도 대마도·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중요한 사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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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팔도총도에는 울릉도·독도는 물론, 대마도도 조선영토로 표시돼 있다.
말했다.
한편 일본 관청이 허가를 한 지도에 대마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명시한 일본 고지도가 발견됐다.

이교희씨(73·대구시 동구 효목동)는 19일 1874년 일본 관청의 허가를 받아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도 오기 조선국 세견 전도(八道 五畿 朝鮮國 細見 全圖)'를 영남일보에 공개했다.

이 지도는 조선 8도를 빨간색과 파란색, 노란색 등 8가지 색상으로 구분해 놓았으며 울릉도의 명칭은

지금과 동일한 울릉도로, 독도는 우산도로 표기하고 있다. 또 지도상 독도가 울릉도
서쪽에 표시돼 있으나 이는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는 일본의 관청이 허가했다는 뜻의 '관허 명치 7년 제1월'이라고 표기되어
1874년(명치 7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씨는 이 지도를 중학교 1학년 때인 1946년
대구시 중구의 한 고서점에서 구입했다며 "지금까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나올 때마다 이 지도를 펼쳐보았는데 일본은 이미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인정해
놓고서도 지금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마도는 조선땅' 1400년대 제작 중국 고지도 일본, 대마도가 조선 땅이란 공식지도-문서 은폐
  미국과 협상에서 국제공인지도로 활용,
  미국-영국 지도도 "대마도는 조선 땅"
  • 최종편집 2011.05.11 19:36:49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8일과 1949년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공식 요구한다.

이 대통령은 당시 우리 지식인 중 일제 식민지 역사교육을 거치지 않고
서양에서 서양역사를 통해, 구한말 우리 역사와 일본의 한국 영토침탈 과정을
공부한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이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된 해상 경계가 있다”고 한 발언 중
‘오래된 해상경계“는 어디일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11일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3회이승만 포럼에서 “이 오래된 해상경계는 대마도와 일본 본 섬 사이의
현해탄”이라고 밝혔다.

즉 대마도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주장이다.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93)는 1832년, 삼국접양지도를 만든다.
이 지도의 해설서가 삼국통람도설이다.

하야시 시헤이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과 그 주위 3국인
조선, 류쿠국(오끼나와), 하이국(북해도)과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小笠原, 일본 남부 태평양 1000km지점의 80여개 군도)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해놓았다.

사진의 지도는 독일인 클라프로토(Klaproth)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대마도-독도가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자료사진
대마도-독도가 모두 우리 영토로 기술된 국제법상 공인지도인 <삼국접양지도> ⓒ자료사진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

지도는 대마도가 명백한 한국 영토임을, 색으로 구분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 프랑스어 판 지도의 국제적 가치는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센터 소장)의
일본어 논문(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と‘伊能島’の 中の 獨島. 독도 창간호,
영남대 독도연구소. 2008)과 조선총독부 문서에 잘 기술되어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당시 일본 정부가 이 지도를 국제공인지도로 활용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개국을 요구한 미국의 페리는,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할 목적으로
이미 미국인을 군도에 살게 하였고, 이 사실을 들어 막부에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막부 측은,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인 ‘삼국통람여지노정
전도(삼국접양지도)’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자, 그 프랑스어판을
제시하여 겨우 미국의 영유권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즉 일본은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미국의 해리스(Harris)대사, 영국의 알코크
(Alcock) 대사 등 당시 열강 대사들에게 이 지도를 제시하면서,
국제적인 영토 분쟁의 공식 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이 같은 미일간의 오가사와라 영토분쟁을 해결한 하야시 시헤이에 대해 해설서에는
'모든 일본인은 하야시 헤이시 선생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함. 광격천황께
바쳐져서 원본을 친히 열람하셨음.'이라는 표현이 있어 이 지도를 일본이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 증명됐다“고 강조했다.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기록된 삼국접양도를 이토오 히로부미도 알고 있었다”면서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자 증거자료를 없애고 사실과 다른 자료를 19세기
부터 지금까지 다량 배포함으로서 우리를 기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마도는 일본 영토로 표기된 위조 지도.@자료사진
▲대마도는 일본 영토로 표기된 위조 지도.@자료사진
일본 극우단체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조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자료사진
▲일본 극우단체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조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자료사진
김대령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거나 박물관에 소장된 일본어판 <삼국접양지도>
(구글에도 있음)는 물론, 심지어는 일본 극우단체가 제시한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조차도 모조품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또 미국 국가기록보존소
에 보관돼 있는 미국 페리제독의 1865년 일본 지도를 함께 제시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미 의회 지시로 미-일 조약체결(1858년)에 따라 페리제독의
정찰결과를 토대로 일본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미 국가기록문서소(NARA ;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당시 기록과,
1862년 미-일 영토협상 후 미국에서 작성된 1864~68년 일본 지도 역시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영국지도에도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기하고
‘대마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지도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현해탄 위치를 대마도 아래 이끼섬 남단으로 표기한 1855년의 미국 지도.
▲현해탄 위치를 대마도 아래 이끼섬 남단으로 표기한 1855년의 미국 지도.


김 대령은 “한-. 일간의 해상 국경선은 일본지명사전에도 ‘고래로부터
일본과 한국,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현해탄(玄海灘), 일본은 겐카이나다(玄界灘 )으로 부르고 있는 곳,
즉, 대마도 남단 한참 아래인 이끼섬과 일본 본토 사이”라며

“일본이 현재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의도는
대마도의 진실을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아직도 유효하다”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대마도 반환하라” 이승만, 에 수십차례 요구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을 열고 대일 관계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대마도 한국 영유권' 발언에 당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9월 9일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다고 뉴데일 리가 보도했다.

뉴데일리에 따르면 다음해인 1949년 1월 8일 연두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제기한다.

이 대통령은 회견에서 "대일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하여야 한다"며 "특히 대마도는 별개로 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여 왔고 도민들을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194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기자회견에서 거듭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마도 문제는 대일 강화회의 석상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일본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역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는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와 함께 한일회담 협상과 맞물리면서 60여 차례나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보도된 국내외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의 대마도를 반환받는 것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함께 중국 여론도 이 같은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이를 지원하는 대규모 시위를 했던 사실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어떤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해방-건국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실지(失地)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 정책 연수를 위해 1년간 머물렀다. 조지 워싱턴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부를 마친 곳. 건국대통령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지 워싱턴대에서 1907년 청년 이승만의 흔적을 찾던 김 대령은 우연히 조지워싱턴대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을 발견하고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 중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래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있다'라는 이 대통령의 언급을 발견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나라가 시끄럽던 시절, 김 대령은 이 '한-일 간의 오래 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에 오른 뒤 기회만 주어지면 "대마도를 불법 점거한 일본은 즉각 반환해야 한다"고 수십 차례나 주장한 그 근거는 무엇인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 년 간의 집요한 연구와 추적 끝에 김 대령은 이승만의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의 명백한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도 밝혀냈다.

김 대령은 11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리는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의 제3회 '이승만 포럼'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그 명쾌한 근거를 제시한다.

동아닷컴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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