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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사건 快刀亂麻! 상세설명

by 보덕봉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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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사건 쾌도난마(快刀亂麻)! 상세히 설명.國民 必讀(필독)
朴正熙大統領 참변후 혼란틈타 북 주도 김대중 내통 치밀한 작전 ,무기고 4시간에 44곳탈취등 설명. ★폭동을 김영삼이 개통된후 민주화운동으로 조작 발표. 특별법 홍준표 작성. 당시. 150여명이 40년지나도 매년 늘어 7000여명 특혜 10여가지.연금 5~7억. 수험생 10%가산점.보훈처 아닌 광주시장 주관.
★전두한대통령, 지만원박사 재판한 광주법원 편향된 재판 답하라
●전두한대통령이 김대중 사형(死刑)시키지 않아 오늘날 비극(悲劇)
★홍준표 특별법 작성자도 유공자라고?(펌)

🇮🇹5.18 북괴 특수군의 내연녀인 함경남도 여고 교사의 5.18 충격 증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중에서 5.18개입 사실 밝힌
북한 특수요원 안창식의 내연녀 증언:

오직 막중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는 북한의 여성 교사로 있으면서
‘5.18공화국 영웅’을 내연남으로 맞이하여 두 아이를 두었다는 참으로
부끄러운 사생활까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 한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5.18역사가 바로 서고,
그 역사가 자유 대한민국을 바로 서게 하는데 기여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에,
나는 밤을 함께 지내면서 내연남으로부터 들었던
광주5.18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여기에 밝히고자 한다.

나의 유년기 시절 가장 큰 희망은 교육부문에서 최고의
전당이라고 하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과 같은 큰 대학에 가려면
하늘의 별따기라고도 할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공부도 우선 잘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집안 배경이다.
학교는 군당 교육부에 나를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생으로 추천하였다.

들떠있던 1986년 8월, 군당 교육부로부터 내려온 통지서에는
읍 중학교의 교장의 아들로 확정지었다고 적혀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에 싸여있을 때 나의 친오빠가 한쪽 다리를 저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와서 군당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라 소개했다.

“너 지금까지 ‘공화국영웅’ 칭호 받은 사람을 직접 본적 없지?
이 사람이 바로 5년 전에 김정일 동지를 직접 만나 뵙고
그분 앞에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야.”

공화국영웅이라는 훌륭한 분을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우리 집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런 그의 추천으로 나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가기로 되었다.
이는 꿈에서나 가능할 일이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 달이 멀다할 정도로 그분한테서
편지가 왔고 나도 답장을 보내주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로
황해남도 연안군 풍천리에 나가 있던 어느 날,
온다는 기별도 없이 ‘5.18공화국영웅’이 의족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내가 생활하는 숙소에 문득
나타났다.

출장을 왔다가 들렸다고 했다. 18살 때 본 이후 6년 만에
보는 사람이지만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도와주신 분이라
너무도 반가웠다. 이것이 내가 15년 연상인 안창식이라는
‘5.18공화국영웅’의 내연녀가 된 사연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함경남도 영광군의 시골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2년 뒤에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를 낳으면서
나의 결혼은 영원히 물건너 갔고 남편 없이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이것이 북한에서 최고의 대학과 최고의 목표를 꿈꾸었던
내 인생의 흔적이고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그는 의족이 매달린 다리마저 잘라내야 했다.
그때서야 그는 그가 어째서 다리를 다쳤는지에 대한
속 이야기를 털어놨다.

1968년 1월 21일 남조선 청와대 습격사건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사건의 내용이 남조선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테러로
국제사회에 여론이 확산되자 북한은 황해북도 연산주둔
124군부대를 해산하고 1970대 초에 북한 함경남도 덕성과
량강도 후치령인근에다가 해산된 기존의 124부대의 기능을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비밀부대를 극비리에 조직하였다.

또한 1970년대 중반에는 평안북도 정주, 동림 일대에
남조선 종심 (남한의 후방)에 대한 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정예특수부대인 일명 자살부대라고도 불리던
‘당원사단’이라는 최정예 부대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인 1966년 가을, 조국을 위해 아들을
바친다는 부모의 서약과 함께 조국을 위해서 죽어야 되는
기구한 운명이 되어 자살부대나 다름없는 국가보위부 소속
첩보훈련소에 모집되어 갔다.

그가 간곳은 서해 바닷가의 어느 이름 없는 섬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백여 명의 같은 또래 어린 동료들과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았다.

당사자의 말에 의하면 그곳에는 아직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
극비에 은폐되어 있는 생체실험장도 있다고 한다.
정신훈련교육은 처음부터 조국을 위해서는 필요하면
부모와 처자식도 죽여야 하고 친구도 무조건 죽여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생천 처음 보는 코가 큰 사람들이 와서 미국말을 가르치고
일본에서 납치되어 온 사람들과 남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나라의 말들을 어린 훈련병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일체 외부와는 접촉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1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1977년 여름에 새롭게 배치되어간 부대는
함경남도 덕성군의 아찔한 골짜기에 주둔해 있는
534라고 하는 특수부대였다.

대위의 군사칭호를 달고 타격대장으로 임명되어간 그는
날아가는 까마귀도 단도 한번 날려서 떨어뜨린다는
유명한 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살당할
때까지 근 2년 동안 대원들에게 살인적인 훈련을 가르쳤다.

박정희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전부대가 비상대기상태에
돌입해 있던 때인 1979년 11월 중순 쯤에 그가 책임지고
있는 타격대에 폭풍명령이 떨어졌다.
준 전시상태에서 소부대기능을 수행하는 타격대를 대상으로
제한적인 폭풍명령이 떨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급히 대원들에게 비상소집명령을
내리고 지휘부에 달려가 보니 부대지휘관이 아닌 상급기관에서
내려온 전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지휘관이 긴급명령을
하달하기 위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급부대 지휘관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부대의 전투준비상태와
각기 타격대들의 기동성 및 전투임무 수행능력을 점검할
목적으로 임의의 소부대를 예고 없이 지명하여 전투력상태를
판정한다는 취지를 설명하면서 타격대의 작전구역은
신포시 앞바다에 있는 마양도라는 섬이며 그날 밤중으로
현지로 이동하여 대기상태에 있을 것을 명령하였다.

그는 상급지휘관의 명령대로 즉시 타격대를 출발시켜 그날
새벽녘에 신포시 마양도에 전개되어 있는 해군기지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30분정도의 시간이 경과될 무렵 사복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 시각부터 타격대는 두 개조로 나뉘어 작전에
임한다는 지시를 전달하면서 미리 작성한 이름을 호출했고,
호출된 사람들은 도로 양쪽으로 나뉘어 섰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 그들보다 인원수가 많은 다른 조는 대기상태에서
차후 명령을 기다릴 것을 명령했다.

평상시 적진에 대한 침투훈련을 할 때마다 잠수함을 이용한
작전훈련을 많이 했던 차라 그들은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잠수함의 항해 방향과 도착지가 어딘지, 목적지에 도착해서
훈련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한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으로 들어 온지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침투훈련을 하면서 남조선육지는 밟아보지 못했어도 해상으로는
남조선 깊숙이 몇 번 드나들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실전을 위한
훈련정도로만 생각했고 공해상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북한으로 올라갈 것으로 그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들의 생각이 아주 크게 빗나갔다.
안내요원이 들고 온 지휘부의 명령서에는 소부대인원들을
지휘하여 남조선의 후방에 침투해서 현지에서 차후명령을
전달받고 수행하라는 임무였다.

지역은 전라남도 일대이고 육지에 상륙하여 도착장소까지의
안내과정은 별도의 인원들이 맡아서 수행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 어떤 임무가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모르고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다른 때와 같은 가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이번만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현실이 배안에 타고 있던 11명의 전투요원들을 긴장시켰다.

그들이 남쪽으로 급히 파견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보태면 북한정권은 남조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서 사살되고 전두환 군부가 등장하면서 조성되고 있던
복잡한 정세와 정치적 혼란이라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배후를 조종하여 국가전복을 시도하려는 구체적인
작전을 사전에 계획하고 있었다.

오늘에 와서는 그 질과 범위가 아주 대담해지고 폭이 넓게
전개되고 있지만 북한이 남조선에서 가장 허점으로 노렸던
부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 체제에
민주정치라는 한 가지 약점이었다.

한국의 정치체제가 다양성에 대한 보장과 존중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북한쪽이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영락없는 틈새였고
합법적으로 친북세력을 양산하고 또한 그들을 이용하여
친북정권을 출연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에돌리지 않고 말하면 지독한 피비린내를 풍겼던
5.18광주사건의 서막도 북한의 이와 같이 치밀한 대남전략의
차원에서 서서히 준비되고 무르익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게 안방이었다.

침투 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
(이 7명은 이미 전에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공작조)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확대될 수
있는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합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어쨌든 먼저 왔거나 나중에 왔거나 적후에서 만난 그들
모두에게 전라도 지역에서의 새로운 무장폭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공동의 과제가 동일하게 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어떤 어려운 일이 제기된다 해도 목숨을 내놓을 지언정
반드시 수행해야 될 당과 조국 앞에 걸머진 본인들의 임무였다.

그들이 남조선 전라도 지역에 침투하여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서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주: 김대중은 혁명정부의 예비내각 명단을 작성해놓고
1980.5.22. 전국폭동을 일으키겠다 선언했다가
5월 17일 자정에 일당과 함께 전격 체포되었음.
당시 검찰조서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언임).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이미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80년 5.18을 전후로 하여 북한이 남조선에서의 전 인민적인
항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편적인 내용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째어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 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지휘부 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본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어떻게 돼서 북한사람들의 정신상태 이상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숭배하고 북한체제를 위해서 주저 없는
희생을 감수하고 나서는지 한 순간의 머리판단으로써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강원도에서 일어났던 사북탄광사태가
전국적인 규모로 탄력을 받지 못하고 부마사태처럼
속수무책으로 조기에 소멸되자 북한정권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북한정권은 남조선에서 전국 형태의 대규모항쟁이라는
사전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실패한 부분들을 무조건 봉창하려고 접어들었다.
결국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는 광주였고 광주폭동을
전략적인 차원에서 치밀하게 조작하여 부마사태나
사북탄광사태 처럼 두번 다시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내부를 조작하여 봉기를 확대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미봉책이라고 생각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 대한 남조선청년학생들과 특히
전라도지역의 민심이 좋지 않았던 만큼 이런 분위기를
광주사건에 적절히 배합하여 지역감정에 이용하고 항쟁의
질을 자극적인 방향으로 극대화시켜 나가게 되면 예상외로
생각지 못했던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북한은 타산하였다.

특히 1980년 5월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적인 규모에서 시작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는 북한정권의 대남작전에 활력을 주고 기지개를
펼 수 있게 하는 큰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1980년 5월 4일부터 전국 학생시위가 본격적으로 발동하였음).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이런 내용들을 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었지만 지금 남한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일어나서 공권력이 흔들리게
되면 인민군대의 남침도발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 당시의
정세였다고 하니 소름이 끼칠 만도 한 일이었다.
잔인하고 피비린내가 났던 5.18광주폭동에 대한 계획은
이런 북한의 끈질긴 도발과 조작의 어두운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준비상태가 마무리되어 갔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광주작전에 참가하기 위해서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부대요원들의
규모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필요가 없는 철저한
보안 사안이기 때문에 해당 당사자들 외에는 어느 부대에서
몇 명이 내려왔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안창식을 비롯한 일행들도 광주사건이 터지기 대략 1~2개월 전에
배후교란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들에서 적지 않은 인원들이
광주작전을 위해서 전라도지방으로 파견되어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같은 부대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온
인원이 몇 명이고 그들이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 등
구체적인 내막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

광주를 포함해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가 극열해지자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북한지휘부는
남조선에 파견된 전투원들에게 일제히 행동을 개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광주에서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전라도
내에 잠재해 있는 지하조직들을 간접적으로 동원해서
반정부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 습격사건들은 그들이 사전에 일일이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광주시내에서 교전이 벌어질 때 북한에서 파견된 요원들에게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전면에 섣불리 나서서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라는 지휘부의 엄명이 떨어져 있었고
그들은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자신들의 행동이
의심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들
스스로가 철저히 경계하였다.

일면식이 전혀 없는 다른 부대에서 파견된 북한전투요원들이
광주시내의 사방에서 각기 자기들이 맡은 임무에 따라
복잡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은 서로의 행동에서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고 우연히 스칠 때마다
간단한 눈인사 정도를 주고 받았다고 했다.

남조선진압군과 봉기군들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교전이
치열하던 어느 날 뜻밖의 일 때문에 몇 명의 일행이
노출될 뻔 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남조선의 광주 시내가 치안부재상태로 방치되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잔인하게 난도질당한 끔찍한
시체들(광주시민들을 자극할 목적으로 특별히 여성들을
골라서 조작한 시체가 많았다고 증언하였음) 이 광주시내의
골목들에서 하룻밤을 자고나면 줄줄이 쏟아져 나오자
정보기관들뿐만이 아니라 언론기관과 심지어 봉기군들까지도
그런 작품을 만들어내는 주인공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감시인원들을 동원시켰다.

지금에 와서 소위 민주화 단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광주에서 일어났던 모든 살인행위를 대한민국 국군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던 공수부대들과 일명 가공된
“시체작품”들과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고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