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智慧 로 삶의 마침표 찾아가는 窓
종교/고승의 글모음

원효대사와 자루빠진 도끼

by 보덕봉 2021. 7. 31.
●원효대사와 자루빠진 도끼 ♡

우리나라 고승중에서 대학자이자
불교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분이 원효대사(元曉大師)
이다,

대사님는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길에
해골에 담긴물을 마신뒤 “일체가 마음에 달렸다”고 하면서 크게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전국을 방랑하는 유행승(遊行僧)이 되었다

그는 유심안락도
(遊心安樂道)에서 ‘정토의 깊은뜻은 본래
범부(凡夫)를 위함이지 보살을 위함이 아니다‘ 라며 불교 대중화에 힘쓰셨고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을 비롯하여 240여편에 이르는불교경전
(佛敎經典)을 집필하셨다,

원효대사는 한곳에 머물지 아니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주유(周遊)하면서 불교 대중화에 힘쓰셨기에 전국사찰중
120여 곳이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다,

원효대사는 34세때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현장법사와 규기화상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꾼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날 옥살이를 하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 왔다,

10년후 45세가 되던해에 두번째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다를 통해 당나라로 가기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는 도중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는 폭풍우를 만나 깊은산속에서 길을잃고 헤메다
겨우 은거할수 있는 토굴을 발견하고 하루밤을 지내게 되었다,
대사는 한밤중
천신만고
(千辛萬苦)
끝에 토굴을 찾아 누우니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얼마를 잤을까?
심한 갈증으로 잠이 깼는데 왠 바가지에 물이 고여있어 캄캄한 밤중이라 아무 생각없이 그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 였는데
물을 마시던 그릇은 바로 해골 바가지 였다,
대사는 여기서

활연대오(豁然大悟) 즉 "환하게 크게 깨우침"을 얻었다,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다,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즉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라는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활연대오(豁然大悟)한 대사님은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또는 거지행세를 하며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포교에 나섰는데 이런 생활을 계속 하면서도 <화엄경>을 알기쉽게 주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원효대사는 미친듯이 이곳 저곳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외치고 다녔다,

수허몰가부위작지천주
(誰許沒柯斧爲斫支天柱)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것인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 !! " 라고..

동네방네 노래하며 외치고 다녀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태종 무열왕이 풍문으로 들려오는 그 노래를 듣고 그 뜻을 알아차렸다,

무열왕이 말하기를
"원효가 아마 귀한집 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아버지를 닮아 큰 인물이 태어나면 나라에 더 큰 복이 될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자루빠진 도끼"는 ‘과부’를 뜻함이다, "하늘을 받칠 기둥"은 '국가의 인재'를 뜻함 이었다,

그래서 내심 원효에게 줄 적당한 과부를 구하던 무열왕에게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마침 오래전 백제와의 전쟁에서 장열히 전사한 부마(사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결혼한지 한달만에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 청상과부가 된
둘째 딸 요석궁주가 떠올랐던 것이다,

원효는 워낙 박식하고 뛰어난 대사인지라 무열왕이 자주 불러 조언을 구하던 까닭에
인연도 깊었고 공주 또한 그를 흠모하는 눈치였다,
한번은 공주가 그를 위해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한적도 있었다,

몇일후 무열왕은 궁중 내관을 시켜 원효를 불러 들이라고 명 하였다,
내관은 어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아다니다가
남산(南山)아래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고있는 원효와 만나게 되었다,

그 내관이 자신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미리 알고있던 원효는
내관의 모습이 가까이 오자 짐짓 발을 헛디딘 척 일부러
문천교(蚊川橋)아래 냇물에 풍덩 빠져 버렸다,

헐레벌떡 뛰어온 내관이 물에빠진 원효를 대궐로 인도하여 무열왕앞에 알현케 했는데
이에 무열왕은 온 몸이 물에젖은 원효를 보고 크게 놀라 요석공주를 불러 대사님을 요석궁으로 모시고가 물에젖은 옷을 갈아 입히고 저녁상을 잘차려 뫼시라고 명하였다,

요석궁으로 인도된 원효는 요석공주가 쓰던 향기나는 옥수로 목욕을 하고 요석공주가 건네준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푸짐한 저녁상에 반주까지 곁들이게 되었다,
어여뿐 공주랑 단둘이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요석공주의 아리따운 향취와
풍만한 육체에 현혹되어 불심도 저버리고 말았다,
요석공주 또한 한달간의 신혼생활이었지만 이미 사내와의 희열넘치는 정분을 아는지라 뜨거워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원효대사의 늠늠한 모습에 빠져들고 말았다,

원효대사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공주의 향기가 성욕을 자극하는데
요석(선화)공주가 과부임을 아는지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는데
자루빠진 도끼가 어디 없을까? 허허 "
그러자 요석공주가 웃으며 말하였다,
“ 대사님은 불심만 깊으신줄 알았는데 대목(목수) 일도 잘 하시나봐요? 호호 "
대사님이 점잖게 대답했다,
“ 허허 물론이다,~ 다만 하지 않을뿐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부처님의 큰제자인 아난도 마등(冕)이라는 여자것을 빌려 쓴적이 있다, ”

요석(선화)공주가 재미있다는 듯 요염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 그럼 대사님께서도 음사(淫事)의
묘미(妙味)를 아신다는 말씀인가요? ”
이에 대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대답했다,
" 옛말에
생지안행(生知安行)
이란 말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 배우지 않아도 쉽게 행할수 있다는 뜻이다,
기둥을 깎는다는 것은 그런것이 아닐런지?

이 말을 들은 요석(선화)공주는 차츰 마음이 동하여 군침을 삼키기 시작 했다,
" 호호 그러시다면 자루빠진 도끼를 빌려 드릴수도 ... 호호 "
하면서 선화공주가 대사님 품에 안기자
“ 선가에는 극락세계가 있지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극락세계지만 한번 가보고 싶군요 "하면서 슬며시 선화공주의 개미같은 허리를 끌어 앉자 공주는 벌써 무아지경에 이른듯 온몸을 비비꼬기 시작 했다,

“ 그럼 우리 음사의 묘미를 한번 느껴 볼까요? "하면서 대사의 하초가 공주님의 옥문앞에 당당하게 도달하여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공주는 대사님의 우람한 양물에 요석궁이 떠나가라 운우의 극치를 느끼며 업치락 뒤치락 끝과 끝의 경계를 넘나들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대사님이 나를 속였군요 극락이라 하셨으면서 이토록 사람을 죽게 만드니 어찌 불심깊은 대사님이 ~ 아 ~ 이럴수가 ~ .... "
" 허허 그런가요? 이또한 자비를 베푸는 선도(禪道)의 길이 아닐런지요? "
하면서 더세게 하초에 힘을 실었다,
" 아 ~ 아~ 선도라 ~ 아 ~ 선도라 ~~ 너무 좋은 선도(道)이다,

이렇게 천지개벽을 하듯 요란하게 통정을 끝내고 슴가쁜 요석공주가 평온을 찾았을때 대사님이 태연하게 말하였다,
“ 불법이란 참으로 신통한바가 있어 인도환생(人道還生)케 하는지라
사람을 죽게도 할수있고 다시 살게도 할수있는 것이다,~ 나무관세음 보살 ... "
" 호호 그런가요?
역시 대사님은 불심이 깊으시니 선도(禪道)의 힘 또한 대단 하시군요 호호 "하면서 대사님의 넓은 가슴을 파고들며 하초를 어루 만지니
" 허허 그런가요?
공주님은 소승을 자꾸 성심(性心)으로 이끄시는군요 "
하면서 아리따라 공주님의 농익은 육체를 또다시 섭렵하며
"성심(性心)또한
불심(佛心)이니 ~ 극락이 저기로다 ~ 나무관세음 보살 ~~ !! "
하면서 또다시 극락의 세계로 공주님을 인도 하였다,

구름이 비를 만난듯 ... 뇌성번개가 폭풍을 만난듯 .. 업치락 뒤치락 ...
뜨겁고 뜨겁게 서로의 몸을 탐익하며 운우지락의 늪에 빠져 3일 밤낮을
열낙(烈樂)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러나 인생사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법

꿈같은 삼일 밤낮이 지나고 나서 원효는 요석에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떠나려고 하자
요석공주는 요염한 자태로 원효대사의 넓은 가슴을 어루 만지며 "어딜 가시든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은 이가슴에 티끌보다도 작고 먼지보다도 작은 소저 이지만 이 넓은 가슴속 한구석에 소저가 기댈곳은 없는지요?" 라고 했다,

그러자 원효는 한참을 망서린후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어디 머물 자리가 있겠소?"하고 답하며
홀연히 일어나 요석궁을 뒤로한체 발걸음을 옮겼다,
요석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 후 단 3일간의 사랑이었지만
요석공주는 배가 불러오고 열달만에 아들 "설총"을 낳았다,
후일 신라 10현의 한사람이며 우리 옛 문장 향찰"이두"를 완성시킨 설총이 바로 원효의 아들이다,

요석은 아들을 낳아 원효를 바라보듯 훌륭하게 키우며
먼발치에서 몸을 숨기며 소식을 듣고 보곤 했는데
죽을때까지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요석공주와 열락의 밤을 보내고 서라벌을 떠난 원효대사는 스스로
실계(失戒)했기에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으로
팔도를 유랑하다가 양주근처를 지날무렵
"한바탕 꿈이요. 허깨비 였구나~!" 하면서 파계한 스님이었지만 새롭게 깨달음을 얻기위해
인적이 드문 소요산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의 수행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요염한 심마니 아가씨 한명이 한밤중에 나타나 하룻밤 묵어가기를 간청하며 수행중인
원효대사를 유혹 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음으로 용맹정진한 원효대사는
단호히 심마니 아가씨의 청을 뿌리쳤다,
그리고 답하였다,

“마음이 생하면 옳고 그르고 크고작고 깨끗하고 더럽고 있고 없는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이 멸하면 상대적 시비의 법이 없어지는 것이니 나 원효에게는 무애자재(無碍在)의 힘이 있노라" 라고 ....

다시말해
한 생각이 일어나면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만법이 멸한다는 진리를 .... 역설했다,

그러자 요염한 심마니 아가씨는 빙긋이 웃으며 사라졌다,
이에 원효대사는 심마니 아가씨가 관세음보살의 현신임을 알아차리고
그곳에 정사를 지은뒤 무애자재의 수행을 쌓는다는 뜻에서
정사 이름을 "자재암
自在)"이라 칭했다,

그러나 여자의 깊은 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법
원효대사의 자재무애
(自在無碍)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원효대사을 사랑한 요석공주의 일념은 변함이 없었다,
요석공주는 원효대사가 정진하고 있는 소요산 입구에 별궁을 짓고 아들 설총과함께
원효대사을 연모했으며 그 터가 지금은 "요석공주별궁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동두천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별궁지 옆에 요석공원을 만들어놓았고
소요산의 한 봉우리를 어여뿐 "공주봉"이라 부르며 기리고 있다,

또한 설총은 원효대사(아버지)에 대해 지극하고 각별한 효심을 가지고 있었다,
낙엽이 떨어지던 어느 가을 날
설총은 원효대사가 머무는 산사를 찾아가니 원효대사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설총은 얼른 뛰어가 마당비를 받아들고 산사의 앞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깨끗이 쓸고 난뒤 “아버님 마당 다 쓸었습니다.” 라고 말을 하자 원효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정말 낙엽하나 없이 깨끗하게 잘 쓸었구나 !!" 하면서 마당 한쪽구석에 쓸어 모아둔 낙엽을 주워와
마당에 다시 뿌리며 설총에게 말하기를
"총아! 가을마당은 이렇게 낙엽이 떨어져 있어야 제격인 것이야 !!" 이 말을 남기고는 어데론가 홀연히 떠나가 버리자
설총은 원효대사의 선문답 같은 이 말 한마디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70세 되던해 음력 3월30일 열반에 들자 설총은 아버지가 못견디게 그리웠고 열반에 드신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그래서 아버지인 원효대사를 화장하고 난 후 남은 재와 진흙을 이겨 아버지의 모습을 빗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오래 주석하고 계셨던 분황사의 법당 한쪽에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모셔두고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여느때처럼 설총은 분황사 법당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는데
원효대사의 소상(진흙상)의 머리가 옆으로 돌려져 있는것이 아닌가!!
분명히 정면을 바라보도록 모셔 놓았는데 원효대사의 소상(진흙상)이
머리를 돌리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후부터 원효대사의 소상(진흙상)은 계속 설총이 아침마다 절을 하던 법당의 중간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목을 돌린 원효대사의 소상은 고려 중기까지 분황사의 성보(聖寶)로 모셔져 있었으나
고려때 몽고군의 침입으로 분황사와 함께 불타버렸다 하는군

어느덧
삼복더위 를앞두고 장마철 청포도가 여무는 계절이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왠지모를 쓸쓸함과 허전함이 밀려오는것은 무슨 연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