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국민의 형성과정과 태극기 시위의 역사적 의미>
- 최 진 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
단군 이래 처음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이 민주공화국의 경제적 기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였고 그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였다.
대한민국은 우파 국가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파 국가를 받쳐주는 우파 국민이 아직 없었다. 애국애족의 마음은 가득했지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 말고는 거의 없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민주주의를 떠들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중)민주주의 간의 구별은 늘 모호했다. 이런 상황에
1946년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0퍼센트가 경제체제로는 사회주의가 좋다고 답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지식인층의 선호도는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건국 당시 대한민국은 한 마디로 모래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그 모래를 다져 단단한 땅으로 만드는 과정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파 국민이 없는 우파 국가는 1950년대에는 이승만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6.25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그의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통치 행태는 독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부정 선거를 계기로 일어난 4.19 학생의거는 독재를 몰아냈으나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민이고 우파 국민은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학생들의 때 이른 민주화 요구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우파와 인민민주주의 좌파 간의 구별이 모호한 가운데 정치사회적 혼란을 불러왔다.
이 위기를 극복한 인물이 군인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불과 18년 사이에 기아선상의 가난한 농업국가를 어엿한 산업국가로 바꾸었다. 천지개벽과도 같은 이 기적과 함께 중산층 우파 국민이
비로소 탄생했다. 그 이전에는 우파 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위대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지만 먹고 살 만한 수준의 사유재산을 가진 자유시민의 양성이 없이는 자유민주주의가 불가능함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층의 고급 취향과는 안 어울리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통속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백 년 전 명치시대의 일본처럼 국가
주도로 기업과 기업인을 키우고 시장을 확대하면서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바깥으로는 북한의 남침 위협이 가중되고 안으로는 자유시민 즉 우파 국민이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경제와 안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자니 정권 안정이 모든 사업의 대전제였다. 1969년 삼선 개헌과 1972년 시월 유신은 정권 안정을 위해 박정희가 내린 고뇌에 찬
결단이었지만 그의 애국심을 이해해주는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 대학생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에게 박정희는 그저 타도해야 할 군인 독재자에
불과했다.
당시의 지적 수준으로는 박정희에 대한 이해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 같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덕분에 등장한 중산층 자유시민들 즉 우파 국민도
독재자 타도에 동참했다. 10.26은 표면적으로는 김재규가 저지른 시해사건이었지만 그 속내를 더 들여다보면 박정희가 낳은 자식들이 박정희를
죽인 역사적 비극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꾀했다면 경제개발 따위는 하지 말고 자신이 살기 위해 나라를 말아먹은 김일성처럼 철저하게 독재를 해야 옳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길을 택했다. 우파 국민이 형성은 되었으나 아직 성숙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터져 나온 민주화 시위는 4.19 때처럼 혼란을 불렀다. 민주화 세력의 요구에는 또 다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가 애매하게
섞여 있었다. 광주사태로 인해 혼란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 혼란을 신속하게 극복한 인물이 군인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이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지만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힘으로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민주화 세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그의 판단이 옳은지 여부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 두고두고 논란거리로 남겠지만 북한의
남침 위협과 우파 국민의 미성숙, 일부 정치꾼들의 수상한 선동, 그리고 제5공화국의 혁혁한 성취를 고려하면 전두환이 옳았다.
전두환은 북한의 위협에 맞서 안보를 지키는 한편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고 중산층 우파 국민의 수를 크게
늘렸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대한민국의 도약을 전 세계에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우파 국민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실질보다 명분에 집착하고 군인을
저평가하는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파 국민의 눈에 전두환 정권은 타도해야 할 군사 독재 정권으로만 비쳤다. 우파 국민의 성숙도가 아직 낮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군부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떠나는 것은 중남미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데에는 넥타이 부대를 앞세운 민주화 세력의 공로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미국식 자유민주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엘리트
장교들의 애국심과 자부심 그리고 자제심이 더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80년대 말 민주화의 일등 공신은 아직 성숙단계에 이르지 못한 우파 국민이 아니고 그들의 요구 앞에 자기 희생을 각오한 전두환과 신군부였다는
사실을 눈치 챈 우파국민은 아직도 거의 없다.
전두환은 2021년 사망할 때까지 민주화를 내세우는 좌파 세력에 의해 30년 넘게 조리돌림을 당했고 우파 국민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전두환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을까. 설령 미리 알았다 해도 전두환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바보짓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 교육받은 군인이었다. 그가 목숨 걸고 대통령 시해 사건을 공정하게 수사하다가 대통령까지
되어야 했던 것도 사관학교 교육의 효과였다. 그런데 민주화 세력에게 그런 전두환을 속죄양으로 바친 것은 우파 국민의 죄였지만 다른 한편
80년대 대학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던 주사파에 대해 너무 관대했던 것은 전두환의 죄였다.
서울대와 연고대에 다니는 전도 유망한 학생들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외칠 때 한국의 언론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대학가의 이 해괴 망칙한 정치 코미디에 대해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가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도 별로 없었거니와 설령 안다 해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말도 안 되는
그 주사파가 30년 뒤 청와대를 장악하리라고는 그때는 상상조차 못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또한 우파 국민과 마찬가지로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주사파를 탄압해도 탄압의 강도가 세지 않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자진 퇴장으로 권력이 마침내 민주화 세력에게 넘어갔다.
30년 가까이 우파 국민을 대신해서 우파 국가를 지탱해온 군부의 힘이 사라지자 주사파 중심의 운동권이 민주화 세력의 비호와 은폐 아래 정계를
위시해서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갔다. 80년대 말부터 공산권의 붕괴가 시작되었고 90년대 초에는 북한 동포 3백만이 굶어 죽었다. 그런데도
대학가의 주사파는 요지부동이었다. 혹시 누군가 전향을 하면 배신자로 찍어 몰매를 가했다. 우파 국민 대다수가 그런 사실을 몰랐고 알아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했다. 심지어 좌파 같은 것은 없다는 물정 모르는 낙관론도 떠돌았다. 그러는 사이 우파 국가 대한민국의 좌경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민주화 세력은 겉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듯했지만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무현 정권으로 갈수록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비판과 조롱과 부정은 당연지사가 되었고 성장보다는 분배를 더 중시하면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을 자주 드러냈다.
민족주의와는 질이 다른 민족지상주의에 따라 친북적 내지 종북적 자세를 자주 보여주는 동시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자꾸 자극하고 한미동맹을
흔드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 특히 대통령 노무현은 대한민국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지어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라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러자 우파국민은 “적화는 되었는데 통일만 되지 않았다”고 소리 죽여
수군거렸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하고 위축감 내지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직 성숙 단계에 이르지 못한 우파국민은 비겁하게 뒷전에서 수군거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던 반면 소녀 취향의 낭만적
좌파 구호에 고무된 젊은이들은 좌파 정부의 비호 아래 걸핏하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몰려나와 세를 과시했다.
대규모 촛불시위는 한국 현대사 속에 처음으로 좌파 국민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였다. 좌파 언론은 근거 없는 이상한 뉴스를 만들어
촛불 시위에 기름을 부었다.
소녀 취향의 낭만적 구호 외에도 노동 해방, 민중 혁명, 반미 반일과 같은 살벌한 구호가 서슴없이 외쳐졌다. 해방후 오랫동안 민주화라는 구호
아래 숨죽이고 있던 인민(민중)민주주의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이 무렵 좌파 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 두 글자를 떼어내야 한다는 섬찟한 주장을 했고 이 주장은 논란 끝에 사실상 관철되었다.
자유에 대한 좌파의 공격은 집요했다. 저강도 사회주의 혁명이 진행 중임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 우파 국민이 많아졌지만 색깔론이라는 혐의가 두려워
대놓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기성 언론은 좌경화되었고 우파 언론으로 알려진 조중동조차 애매한 보도 태도를 취했다.
노무현에 크게 실망한 국민의 지지 덕분에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이명박까지도 이념 논쟁을 애써 회피했다.
중도 실용주의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좌파 언론의 가짜 뉴스에 의해 격발된 촛불 시위 앞에 맥을 못 추다가 결국 식물 정부로 전락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좌파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우파 국민은 우파 정권의 비겁함에 크게 실망했지만 개탄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해볼 힘이
없었다.
우파 국민의 미성숙을 말해주는 증거다.
극소수의 아스팔트 우파들만이 게릴라처럼 싸웠으나 새누리당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조중동은 제대로 보도해주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라는 중도노선으로 대선에서 겨우 이긴 박근혜는 취임하자마자 놀랍게도 전두환 이후 가장 선명한 우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좌파와의 싸움보다 타협에 길들여진 새누리당과 조중동은 박근혜의 우파노선이 불편했다. 게다가 박근혜는 국익만 생각하고
그들에게 정치적 이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2016년 초 당내 공천 다툼이 격화되고 이를 조중동이 집중 보도하는 바람에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이를 계기로 여러 해 동안 세월호 촛불 시위에 시달려온 박근혜 정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2016년 가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한겨레신문과 손을 잡고 가짜 뉴스를 쏟아내면서 박근혜 정권을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광화문에서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촛불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같은 해 12월9일 새누리당은 민주당과 손을 잡고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모조리 불법사기였다.
좌파의 바다 위에 외로운 섬처럼 떠 있던 박근혜 우파 정권이 어이없이 무너지는 꼴을 지켜보던 우파 국민은 박근혜에 대한 불법 사기 탄핵이
우파 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불법 사기 탄핵임을 직감하고 하나 둘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탄핵 무효”를 외치기 시작했다.
2016년 12월 추운 겨울의 일이었다. 촛불 시위대가 점령한 광화문에는 접근도 못 하고 서울역 앞이나 대한문 앞 좁은 공간에 수백 명 정도
모이던 태극기 시민의 수는 빠른 속도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해가 바뀌어 2017년이 되자 매주 토요일 열리는 태극기 시위의 규모는 몇 천,
몇 만이 아니라 십만을 넘길 정도가 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주 전국 각지에서 자비로 대절한 관광 버스를 타고 몰려왔다. 광주,
목포, 전주 같은 곳에서도 왔다.
같은 해 3월1일 광화문과 시청 앞에 모인 군중의 규모는 단군 이래 최대였다. 광화문과 시청 앞은 물론이고 종로와 을지로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대단한 장관이었다. 태극기 시위에 참석한 우파국민은 자신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뭉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우파국민 없이
출범한 대한민국의 위기 속에서 그 위기의 실체를 정확하게 깨닫고 애국 일념으로 뭉친 성숙한 우파국민이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우파 국민 사이에서는 대한민국의 이번 위기는 6.25 당시 낙동강 전투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낙동강 전투에서는 적이 바깥에 있고 전선이 분명했지만 이번에는 적이 내부에 널리 퍼져 있고 전선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 그 얘기의 근거였다.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빚은 불법 사기 탄핵 덕분에 태극기 시위가 등장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오히려 자신을 밑에서 받쳐줄 성숙한 우파 국민의
존재를 확인하는 망외의 소득을 올렸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태극기 시위는 불법 사기 탄핵을 막지 못한 채 처참하게 실패했고 대한민국의 위기는 문재인 정권 5년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최대의 위기를 거치면서 태극기 시위가 등장한 덕분에 언젠가 우파 국가와 우파 국민이 아래위로 합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바로 이것이 태극기 시위가 갖는 최대의 역사적 의미일 것이다. 늘 그렇듯 불운 속에 뜻밖의 행운이 깃들어 있기도 해서
역사의 행로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예측이 참 어렵다.
태극기 시위대는 세계 최고령 시위대였다.
촛불 시위의 주역이 젊은이들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태극기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현대사의 풍상을 몸소 겪은 6070
늙은이들이었다. 눈발이 펄펄 날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나온 80대 상노인도 있었다. 길을 가던 젊은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있는 늙은이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현대사의 풍상을 몸소 체험하면서 터득한 늙은 우파
국민의 지혜와 애국심을 젊은이들이 그렇게 함부로 조롱해도 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젊은이들이 지금처럼 풍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도대체 누구 덕분인가.
태극기 시위에 참가한 어떤 늙은이는 시청역의 계단을 오르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살만큼 살았어. 죽어도 괜찮아. 하지만 공산국가를 자식들한테 물려줄 수는 없잖아.”
그 늙은이는 불법 사기 탄핵이 체제 위기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결연한 의지의 우파 국민은 고립무원이었다. 새누리당은 민주당과 손을 잡고
불법 사기 탄핵을 자행함으로써 우파 정당이기를 포기했다.
조중동은 좌파 언론과 함께 아무 죄 없는 여자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가짜 뉴스를 만듦으로써 우파 언론이기를 포기했다.
조중동은 자신들의 사옥 바로 앞에서 태극기 시위가 엄청난 규모로 커지는 것을 뻔히 목격하고도 단 한 줄의 보도조차 해주지 않는 만행을 저질렀다.
2017년 2월 중순쯤 되어서야 조금씩 보도했지만 축소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태극기 시위대는 조중동 사옥 앞을 지날 때마다 배신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주먹을 흔들었지만 그들은 너무 늙고 착하고 무력했다. 조중동 사옥에 돌을 던지는 사람조차 없었다. 놀라운 비폭력 평화시위였다.
우파 국민은 자신들을 대표해주는 우파 정당도 없고 자신들을 대변해주는 우파 언론도 없이 악전고투를 벌이는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파면을 결정함에 따라 우파 정부마저 잃어버렸다. 그 후 문재인 정권이 끝날 때까지 우파국민은 자신들의
조국에서 망국의 설움을 씹으며 망명객처럼 살아야 했다.
1948년 건국 당시 우파 국가는 있는데 우파 국민이 없었던 반면 70년이 지난 2017년 불법 사기 탄핵 이후엔 우파 국민은 있는데 우파
국가가 없어져버린 듯했다.
우파 정당, 우파 언론, 우파 정부가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문재인과 주사파 일당은 불법 사기 탄핵을 틈타 우파 정부를 하이재킹한 다음 5년 내내 좌파 국민과 우파 국민을 갈라치고 인민민주주의 식의
사회경제정책과 반미반일 친중친북 외교정책을 강화했다.
그러나 우파 국가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허물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했다.
왜일까. 우파 국민의 자유민주주의가 좌파 국민의 인민민주주의보다 힘이 더 강했던 탓일까. 아니면 문재인 주사파 정권은 애당초 혁명에 별
관심이 없고 좌파 국민이라 해봤자 실은 그다지 좌파가 아니었던 탓일까. 설령 이 추측이 맞다 해도 우파 국민의 힘은 좌우 균형에 이르기에는
아직 너무 약하다.
우파가 무력하면 좌파는 역사의 악마가 된다. 우파를 말살해버린 스탈린이나 김일성은 역사의 악마가 되었다. 약하나마 늙은 우파 국민이 있었기에
문재인은 그 정도에 그쳤다. 악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좌파는 우파를 용인할 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자유의 나라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이고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것이다. 윤석렬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가 평화와 번영의
원천이고 최고의 보편적 가치임을 확실하게 천명함으로써 불법 사기 탄핵 이후 망명객처럼 살아야 했던 늙은 우파 국민의 염원에 부응했다. 자유는
대개 젊은이들의 가치인데 대한민국에서는 늙은이들의 가치가 되었다. 무슨 나라가 젊은이들보다 늙은이들이 더 진취적인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윤석렬 정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것은 그 때문이다.
2030 젊은이들은 좀 더 진취적이고 자유의 가치에 대해 우호적이면 좋겠다. 머지않아 이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다. 이
젊은이들을 위해서라도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늙은 우파의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건국 이후 지금껏 우파 국민은 자유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자유의 나라를 만들어왔다. 80년대 이후 40년 동안 이념 전쟁에서 좌파가 거의
일방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던 것은 우파국민의 무지 탓이 적지 않다.
이념 전쟁에서의 좌파의 승리가 우파 정당과 우파 언론을 허물고 우파 정부마저 허문 다음 문재인 주사파 정권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은 총칼로 하지만 정치는 말로 한다. 정치판의 이념전쟁은 말싸움에서 시작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싸움에서 우파가 좌파를 이기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말이란 게 원래 친좌파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겨야 한다. 이를 악물고라도 이겨서 우파 언론과 우파 정당과 우파 정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산다.
말싸움에서부터 이기지 않으면 우파는 다시 좌파에 압도당하고 윤석렬 정부는 무너지거나 비굴한 타협을 하게 될 것이다.
=== 받은 글 ===
- 최 진 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
단군 이래 처음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이 민주공화국의 경제적 기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였고 그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였다.
대한민국은 우파 국가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파 국가를 받쳐주는 우파 국민이 아직 없었다. 애국애족의 마음은 가득했지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 말고는 거의 없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민주주의를 떠들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중)민주주의 간의 구별은 늘 모호했다. 이런 상황에
1946년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0퍼센트가 경제체제로는 사회주의가 좋다고 답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지식인층의 선호도는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건국 당시 대한민국은 한 마디로 모래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그 모래를 다져 단단한 땅으로 만드는 과정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파 국민이 없는 우파 국가는 1950년대에는 이승만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6.25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그의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통치 행태는 독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부정 선거를 계기로 일어난 4.19 학생의거는 독재를 몰아냈으나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민이고 우파 국민은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학생들의 때 이른 민주화 요구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우파와 인민민주주의 좌파 간의 구별이 모호한 가운데 정치사회적 혼란을 불러왔다.
이 위기를 극복한 인물이 군인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불과 18년 사이에 기아선상의 가난한 농업국가를 어엿한 산업국가로 바꾸었다. 천지개벽과도 같은 이 기적과 함께 중산층 우파 국민이
비로소 탄생했다. 그 이전에는 우파 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위대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지만 먹고 살 만한 수준의 사유재산을 가진 자유시민의 양성이 없이는 자유민주주의가 불가능함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층의 고급 취향과는 안 어울리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통속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백 년 전 명치시대의 일본처럼 국가
주도로 기업과 기업인을 키우고 시장을 확대하면서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바깥으로는 북한의 남침 위협이 가중되고 안으로는 자유시민 즉 우파 국민이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경제와 안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자니 정권 안정이 모든 사업의 대전제였다. 1969년 삼선 개헌과 1972년 시월 유신은 정권 안정을 위해 박정희가 내린 고뇌에 찬
결단이었지만 그의 애국심을 이해해주는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 대학생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에게 박정희는 그저 타도해야 할 군인 독재자에
불과했다.
당시의 지적 수준으로는 박정희에 대한 이해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 같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덕분에 등장한 중산층 자유시민들 즉 우파 국민도
독재자 타도에 동참했다. 10.26은 표면적으로는 김재규가 저지른 시해사건이었지만 그 속내를 더 들여다보면 박정희가 낳은 자식들이 박정희를
죽인 역사적 비극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꾀했다면 경제개발 따위는 하지 말고 자신이 살기 위해 나라를 말아먹은 김일성처럼 철저하게 독재를 해야 옳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길을 택했다. 우파 국민이 형성은 되었으나 아직 성숙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터져 나온 민주화 시위는 4.19 때처럼 혼란을 불렀다. 민주화 세력의 요구에는 또 다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가 애매하게
섞여 있었다. 광주사태로 인해 혼란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 혼란을 신속하게 극복한 인물이 군인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이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지만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힘으로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민주화 세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그의 판단이 옳은지 여부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 두고두고 논란거리로 남겠지만 북한의
남침 위협과 우파 국민의 미성숙, 일부 정치꾼들의 수상한 선동, 그리고 제5공화국의 혁혁한 성취를 고려하면 전두환이 옳았다.
전두환은 북한의 위협에 맞서 안보를 지키는 한편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고 중산층 우파 국민의 수를 크게
늘렸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대한민국의 도약을 전 세계에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우파 국민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실질보다 명분에 집착하고 군인을
저평가하는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파 국민의 눈에 전두환 정권은 타도해야 할 군사 독재 정권으로만 비쳤다. 우파 국민의 성숙도가 아직 낮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군부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떠나는 것은 중남미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데에는 넥타이 부대를 앞세운 민주화 세력의 공로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미국식 자유민주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엘리트
장교들의 애국심과 자부심 그리고 자제심이 더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80년대 말 민주화의 일등 공신은 아직 성숙단계에 이르지 못한 우파 국민이 아니고 그들의 요구 앞에 자기 희생을 각오한 전두환과 신군부였다는
사실을 눈치 챈 우파국민은 아직도 거의 없다.
전두환은 2021년 사망할 때까지 민주화를 내세우는 좌파 세력에 의해 30년 넘게 조리돌림을 당했고 우파 국민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전두환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을까. 설령 미리 알았다 해도 전두환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바보짓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 교육받은 군인이었다. 그가 목숨 걸고 대통령 시해 사건을 공정하게 수사하다가 대통령까지
되어야 했던 것도 사관학교 교육의 효과였다. 그런데 민주화 세력에게 그런 전두환을 속죄양으로 바친 것은 우파 국민의 죄였지만 다른 한편
80년대 대학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던 주사파에 대해 너무 관대했던 것은 전두환의 죄였다.
서울대와 연고대에 다니는 전도 유망한 학생들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외칠 때 한국의 언론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대학가의 이 해괴 망칙한 정치 코미디에 대해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가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도 별로 없었거니와 설령 안다 해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말도 안 되는
그 주사파가 30년 뒤 청와대를 장악하리라고는 그때는 상상조차 못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또한 우파 국민과 마찬가지로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주사파를 탄압해도 탄압의 강도가 세지 않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자진 퇴장으로 권력이 마침내 민주화 세력에게 넘어갔다.
30년 가까이 우파 국민을 대신해서 우파 국가를 지탱해온 군부의 힘이 사라지자 주사파 중심의 운동권이 민주화 세력의 비호와 은폐 아래 정계를
위시해서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갔다. 80년대 말부터 공산권의 붕괴가 시작되었고 90년대 초에는 북한 동포 3백만이 굶어 죽었다. 그런데도
대학가의 주사파는 요지부동이었다. 혹시 누군가 전향을 하면 배신자로 찍어 몰매를 가했다. 우파 국민 대다수가 그런 사실을 몰랐고 알아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했다. 심지어 좌파 같은 것은 없다는 물정 모르는 낙관론도 떠돌았다. 그러는 사이 우파 국가 대한민국의 좌경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민주화 세력은 겉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듯했지만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무현 정권으로 갈수록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비판과 조롱과 부정은 당연지사가 되었고 성장보다는 분배를 더 중시하면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을 자주 드러냈다.
민족주의와는 질이 다른 민족지상주의에 따라 친북적 내지 종북적 자세를 자주 보여주는 동시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자꾸 자극하고 한미동맹을
흔드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 특히 대통령 노무현은 대한민국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지어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라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러자 우파국민은 “적화는 되었는데 통일만 되지 않았다”고 소리 죽여
수군거렸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하고 위축감 내지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직 성숙 단계에 이르지 못한 우파국민은 비겁하게 뒷전에서 수군거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던 반면 소녀 취향의 낭만적
좌파 구호에 고무된 젊은이들은 좌파 정부의 비호 아래 걸핏하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몰려나와 세를 과시했다.
대규모 촛불시위는 한국 현대사 속에 처음으로 좌파 국민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였다. 좌파 언론은 근거 없는 이상한 뉴스를 만들어
촛불 시위에 기름을 부었다.
소녀 취향의 낭만적 구호 외에도 노동 해방, 민중 혁명, 반미 반일과 같은 살벌한 구호가 서슴없이 외쳐졌다. 해방후 오랫동안 민주화라는 구호
아래 숨죽이고 있던 인민(민중)민주주의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이 무렵 좌파 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 두 글자를 떼어내야 한다는 섬찟한 주장을 했고 이 주장은 논란 끝에 사실상 관철되었다.
자유에 대한 좌파의 공격은 집요했다. 저강도 사회주의 혁명이 진행 중임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 우파 국민이 많아졌지만 색깔론이라는 혐의가 두려워
대놓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기성 언론은 좌경화되었고 우파 언론으로 알려진 조중동조차 애매한 보도 태도를 취했다.
노무현에 크게 실망한 국민의 지지 덕분에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이명박까지도 이념 논쟁을 애써 회피했다.
중도 실용주의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좌파 언론의 가짜 뉴스에 의해 격발된 촛불 시위 앞에 맥을 못 추다가 결국 식물 정부로 전락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좌파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우파 국민은 우파 정권의 비겁함에 크게 실망했지만 개탄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해볼 힘이
없었다.
우파 국민의 미성숙을 말해주는 증거다.
극소수의 아스팔트 우파들만이 게릴라처럼 싸웠으나 새누리당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조중동은 제대로 보도해주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라는 중도노선으로 대선에서 겨우 이긴 박근혜는 취임하자마자 놀랍게도 전두환 이후 가장 선명한 우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좌파와의 싸움보다 타협에 길들여진 새누리당과 조중동은 박근혜의 우파노선이 불편했다. 게다가 박근혜는 국익만 생각하고
그들에게 정치적 이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2016년 초 당내 공천 다툼이 격화되고 이를 조중동이 집중 보도하는 바람에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이를 계기로 여러 해 동안 세월호 촛불 시위에 시달려온 박근혜 정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2016년 가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한겨레신문과 손을 잡고 가짜 뉴스를 쏟아내면서 박근혜 정권을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광화문에서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촛불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같은 해 12월9일 새누리당은 민주당과 손을 잡고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모조리 불법사기였다.
좌파의 바다 위에 외로운 섬처럼 떠 있던 박근혜 우파 정권이 어이없이 무너지는 꼴을 지켜보던 우파 국민은 박근혜에 대한 불법 사기 탄핵이
우파 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불법 사기 탄핵임을 직감하고 하나 둘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탄핵 무효”를 외치기 시작했다.
2016년 12월 추운 겨울의 일이었다. 촛불 시위대가 점령한 광화문에는 접근도 못 하고 서울역 앞이나 대한문 앞 좁은 공간에 수백 명 정도
모이던 태극기 시민의 수는 빠른 속도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해가 바뀌어 2017년이 되자 매주 토요일 열리는 태극기 시위의 규모는 몇 천,
몇 만이 아니라 십만을 넘길 정도가 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주 전국 각지에서 자비로 대절한 관광 버스를 타고 몰려왔다. 광주,
목포, 전주 같은 곳에서도 왔다.
같은 해 3월1일 광화문과 시청 앞에 모인 군중의 규모는 단군 이래 최대였다. 광화문과 시청 앞은 물론이고 종로와 을지로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대단한 장관이었다. 태극기 시위에 참석한 우파국민은 자신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뭉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우파국민 없이
출범한 대한민국의 위기 속에서 그 위기의 실체를 정확하게 깨닫고 애국 일념으로 뭉친 성숙한 우파국민이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우파 국민 사이에서는 대한민국의 이번 위기는 6.25 당시 낙동강 전투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낙동강 전투에서는 적이 바깥에 있고 전선이 분명했지만 이번에는 적이 내부에 널리 퍼져 있고 전선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 그 얘기의 근거였다.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빚은 불법 사기 탄핵 덕분에 태극기 시위가 등장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오히려 자신을 밑에서 받쳐줄 성숙한 우파 국민의
존재를 확인하는 망외의 소득을 올렸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태극기 시위는 불법 사기 탄핵을 막지 못한 채 처참하게 실패했고 대한민국의 위기는 문재인 정권 5년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최대의 위기를 거치면서 태극기 시위가 등장한 덕분에 언젠가 우파 국가와 우파 국민이 아래위로 합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바로 이것이 태극기 시위가 갖는 최대의 역사적 의미일 것이다. 늘 그렇듯 불운 속에 뜻밖의 행운이 깃들어 있기도 해서
역사의 행로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예측이 참 어렵다.
태극기 시위대는 세계 최고령 시위대였다.
촛불 시위의 주역이 젊은이들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태극기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현대사의 풍상을 몸소 겪은 6070
늙은이들이었다. 눈발이 펄펄 날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나온 80대 상노인도 있었다. 길을 가던 젊은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있는 늙은이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현대사의 풍상을 몸소 체험하면서 터득한 늙은 우파
국민의 지혜와 애국심을 젊은이들이 그렇게 함부로 조롱해도 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젊은이들이 지금처럼 풍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도대체 누구 덕분인가.
태극기 시위에 참가한 어떤 늙은이는 시청역의 계단을 오르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살만큼 살았어. 죽어도 괜찮아. 하지만 공산국가를 자식들한테 물려줄 수는 없잖아.”
그 늙은이는 불법 사기 탄핵이 체제 위기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결연한 의지의 우파 국민은 고립무원이었다. 새누리당은 민주당과 손을 잡고
불법 사기 탄핵을 자행함으로써 우파 정당이기를 포기했다.
조중동은 좌파 언론과 함께 아무 죄 없는 여자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가짜 뉴스를 만듦으로써 우파 언론이기를 포기했다.
조중동은 자신들의 사옥 바로 앞에서 태극기 시위가 엄청난 규모로 커지는 것을 뻔히 목격하고도 단 한 줄의 보도조차 해주지 않는 만행을 저질렀다.
2017년 2월 중순쯤 되어서야 조금씩 보도했지만 축소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태극기 시위대는 조중동 사옥 앞을 지날 때마다 배신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주먹을 흔들었지만 그들은 너무 늙고 착하고 무력했다. 조중동 사옥에 돌을 던지는 사람조차 없었다. 놀라운 비폭력 평화시위였다.
우파 국민은 자신들을 대표해주는 우파 정당도 없고 자신들을 대변해주는 우파 언론도 없이 악전고투를 벌이는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파면을 결정함에 따라 우파 정부마저 잃어버렸다. 그 후 문재인 정권이 끝날 때까지 우파국민은 자신들의
조국에서 망국의 설움을 씹으며 망명객처럼 살아야 했다.
1948년 건국 당시 우파 국가는 있는데 우파 국민이 없었던 반면 70년이 지난 2017년 불법 사기 탄핵 이후엔 우파 국민은 있는데 우파
국가가 없어져버린 듯했다.
우파 정당, 우파 언론, 우파 정부가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문재인과 주사파 일당은 불법 사기 탄핵을 틈타 우파 정부를 하이재킹한 다음 5년 내내 좌파 국민과 우파 국민을 갈라치고 인민민주주의 식의
사회경제정책과 반미반일 친중친북 외교정책을 강화했다.
그러나 우파 국가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허물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했다.
왜일까. 우파 국민의 자유민주주의가 좌파 국민의 인민민주주의보다 힘이 더 강했던 탓일까. 아니면 문재인 주사파 정권은 애당초 혁명에 별
관심이 없고 좌파 국민이라 해봤자 실은 그다지 좌파가 아니었던 탓일까. 설령 이 추측이 맞다 해도 우파 국민의 힘은 좌우 균형에 이르기에는
아직 너무 약하다.
우파가 무력하면 좌파는 역사의 악마가 된다. 우파를 말살해버린 스탈린이나 김일성은 역사의 악마가 되었다. 약하나마 늙은 우파 국민이 있었기에
문재인은 그 정도에 그쳤다. 악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좌파는 우파를 용인할 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자유의 나라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이고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를 위한 것이다. 윤석렬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가 평화와 번영의
원천이고 최고의 보편적 가치임을 확실하게 천명함으로써 불법 사기 탄핵 이후 망명객처럼 살아야 했던 늙은 우파 국민의 염원에 부응했다. 자유는
대개 젊은이들의 가치인데 대한민국에서는 늙은이들의 가치가 되었다. 무슨 나라가 젊은이들보다 늙은이들이 더 진취적인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윤석렬 정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것은 그 때문이다.
2030 젊은이들은 좀 더 진취적이고 자유의 가치에 대해 우호적이면 좋겠다. 머지않아 이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다. 이
젊은이들을 위해서라도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늙은 우파의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건국 이후 지금껏 우파 국민은 자유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자유의 나라를 만들어왔다. 80년대 이후 40년 동안 이념 전쟁에서 좌파가 거의
일방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던 것은 우파국민의 무지 탓이 적지 않다.
이념 전쟁에서의 좌파의 승리가 우파 정당과 우파 언론을 허물고 우파 정부마저 허문 다음 문재인 주사파 정권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은 총칼로 하지만 정치는 말로 한다. 정치판의 이념전쟁은 말싸움에서 시작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싸움에서 우파가 좌파를 이기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말이란 게 원래 친좌파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겨야 한다. 이를 악물고라도 이겨서 우파 언론과 우파 정당과 우파 정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산다.
말싸움에서부터 이기지 않으면 우파는 다시 좌파에 압도당하고 윤석렬 정부는 무너지거나 비굴한 타협을 하게 될 것이다.
=== 받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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